왜 양산 전기차가 슈퍼카보다 출발이 빠를까?
출발은 마력이 아니라 토크가 결정한다. 회전수 0에서 마력은 무의미하고, 전기 모터는 그 0에서 곧바로 최대 토크를 낸다. 내연기관의 종 모양 토크 곡선과 변속 끊김이 출발에서 진다.
수억짜리 슈퍼카와 그보다 훨씬 저렴한 양산 전기 세단이 신호등에서 나란히 섰다.
초록불이 켜진다. 100 km/h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전기 세단이 빠르다.
마력이 훨씬 낮은 차가 어떻게 슈퍼카를 이길까?
직관적인 답은 "마력이 높을수록 빠르다"다. 슈퍼카는 1000마력급, 양산 전기 세단은 보통 400~700마력 사이다. 마력만 보면 슈퍼카가 압도적이다.
그런데 출발에서는 진다. 마력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출발을 결정하는 다른 숫자가 있다.
그 숫자는 토크다. 토크는 회전축을 비트는 힘이고, 마력은 토크에 회전수를 곱한 일률이다. 같은 마력도 회전수가 낮으면 토크는 크고, 회전수가 높으면 토크는 작아진다.
출발은 정지 상태에서 시작한다. 회전수가 0인 그 순간, 마력은 무의미하다. 0에 무엇을 곱해도 0이기 때문이다. 출발을 결정하는 것은 회전수가 0일 때 끌어낼 수 있는 토크다.
전기 모터는 자기장이 즉시 형성된다. 회전수 0에서 곧바로 최대 토크가 나온다. 회전수가 올라가도 토크는 거의 평평하게 유지된다.
내연기관은 다르다. 연료가 연소해 피스톤을 밀어야 토크가 나오는데, 그 사이클은 회전수가 어느 정도 올라야 효율적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토크 곡선은 종 모양이다. 중간 회전수에서 정점을 찍고, 그 위아래로는 떨어진다. 회전수 0에서의 토크는 빈약하다.
여기에 변속기가 더해진다. 내연기관은 토크가 부족한 저회전 구간을 피하려고 여러 단의 기어로 회전수를 늘 정점 근처에 유지한다. 그런데 기어가 바뀌는 순간 0.2초쯤 동력이 끊긴다. 양산 전기차는 보통 단일 기어다. 출발부터 100 km/h까지 끊김 없이 한 번에 간다.
두 곡선을 같은 회전수 축에 겹쳐 보자. 전기 모터는 0 RPM부터 최대 토크가 평평하게 깔리고, 내연기관은 종 모양으로 중간 회전수에서 정점을 친다.
출발 영역은 회전수 0 근처다. 그 자리에서 두 곡선의 격차가 가장 크다.
내연기관은 그 빈약한 구간을 피하려고 기어로 회전수를 옮겨 다니지만, 변속할 때마다 0.2초씩 끊긴다. 전기차는 단일 기어로 한 줄에 간다.
RPM 슬라이더를 움직이면 두 곡선 위 점이 이동하며 현재 토크를 읽어준다. 출발 영역(0 RPM 부근)에서 격차가 가장 크고, 출발 재생을 누르면 내연기관의 변속 끊김이 보인다.
출발은 토크 게임이고, 최고속도는 마력 게임이다. 슈퍼카는 200 km/h를 넘어서야 본격적으로 우위를 잡는다. 그때부터는 고회전수에서 마력을 짜내는 내연기관의 영역이다.
같은 원리가 다른 곳에서도 보인다. 전기 자전거가 페달을 처음 밟는 순간 부드럽게 밀어주는 이유. 산업용 전기 모터가 무거운 짐을 정지 상태에서 곧바로 들어올리는 이유. 모두 0 RPM 토크가 즉시 나오는 같은 메커니즘이다.
디젤 트럭이 가솔린 트럭보다 견인력이 좋은 것도 비슷하다. 디젤은 가솔린보다 낮은 회전수에서 더 큰 토크를 낸다. 가속은 가솔린이 빠르지만, 무거운 트레일러를 끌어내는 일은 토크가 한다.
결국 한 가지 숫자가 모든 상황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출발에는 토크, 최고속도에는 마력, 견인에는 저회전 토크다. 어떤 일에 어떤 숫자가 필요한지 알면, 마력 표만 보고 차의 성격을 짐작하는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