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 간격이 도체와 반도체를 가른다
원자 하나 안에서 전자는 띄엄띄엄한 에너지 자리에만 앉는다. 그런데 원자를 아주 많이 모아 고체를 만들면, 같은 자리들이 서로 밀려나 촘촘한 무리로 퍼져요. 이 무리를 에너지 띠라고 부른다. 전자로 꽉 찬 맨 위 띠를 원자가띠, 그 위의 빈 띠를 전도띠라 하고, 둘 사이의 빈 간격이 바로 띠 간격이다. 이 하나의 간격이 0인지, 좁은지, 넓은지가 도체와 반도체와 절연체를 가른다. 간격 하나가 물질을 가른다.
띠 간격을 0에서 10 까지 키워 본다. 그 간격은 원자가띠 꼭대기와 전도띠 바닥 사이의 에너지 폭이고, 단위는 eV예요. 같은 글자를 쓰는 탄성계수나 전기장과는 다른 양이라, 언제나 아래 첨자를 붙여 구분한다. 간격이 0이면 두 띠가 맞붙어 전자가 자유롭게 흘러 도체가 되고, 1.1 쯤이면 규소 같은 반도체이며, 4 보다 넓으면 다이아몬드 같은 절연체가 돼요. 숫자 하나가 세 세계를 가른다. 간격이 가른다.
그럼 띠는 어디서 올까요. 원자가 딱 하나면 전자는 뚜렷한 자리 하나에 앉는다. 원자를 많이 가까이 붙이면, 같은 자리가 겹칠 수 없어 아주 조금씩 다른 여러 자리로 갈라져요. 개수를 키우면 그 자리들이 점점 촘촘해지다가, 눈으로는 이어진 하나의 띠처럼 뭉쳐 보인다. 이것이 띄엄띄엄한 자리가 고체의 이어진 띠로 넘어가는 다리다. 많으면 띠가 된다. 간격이 가른다.
이제 띠 안을 전자로 채운다. 전자는 낮은 에너지부터 차곡차곡 채워지는데, 어떤 에너지에 앉을 자리가 얼마나 많은지는 상태밀도 S(E) 가 알려줘요. 여기서 S(E) 는 단위 에너지당 상태 수 states/eV 로, 열의 엔트로피 S(J/K) 와는 전혀 다른 양이다. 전자가 채운 맨 위 높이를 페르미 준위라 부른다. 온도를 올리면 그 경계가 흐물흐물 번져서, 딱 잘린 계단이 부드러운 문턱으로 바뀌어요. EF 근처가 그 문턱이다.
순수한 반도체에서는 준위가 간격 한가운데에 놓이고, 전자와 빈자리가 아주 조금씩 짝지어 생긴다. 여기에 불순물을 살짝 섞는 것이 도핑이에요. 한 종류는 전도띠 바로 아래에 여분 전자를 내주는 자리가 생겨 준위가 위로 올라가고, 주로 움직이는 것은 전자다. 다른 종류는 원자가띠 바로 위에 전자를 받는 자리가 생겨 준위가 아래로 내려가고, 주로 움직이는 것은 빈자리예요. 이 EF 이동이 다이오드와 트랜지스터를 만드는 핵심이다. 준위를 옮기는 일이 소자를 만든다.
마지막으로 온도를 올리며 전도도를 잰다. 금속은 이미 전자가 자유로워서, 온도가 오르면 격자 흔들림에 부딪혀 오히려 방해가 커지고 전도도가 1/T처럼 떨어져요. 반면 반도체는 온도가 오르면 열에너지가 간격을 넘겨 전자를 전도띠로 올려 주므로, 운반자가 exp(-Eg/2kT) 처럼 급격히 늘고 전도도가 올라간다. 이 정반대 방향이 간격의 존재를 곧장 드러내요. 아래 곡선은 흐름을 보여주는 규격화된 개형이다. 방향이 간격을 말한다.